훈민정음에 대해서 알아보자!!

2019. 11. 20. 23:51카테고리 없음

 

1443년에 창제된 훈민정음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다.

 

목판본으로 2권 2책이며,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에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핮나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한 훈민정음예의본과

글자를 지은 뜻과 사용법 등을 풀이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첫권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어 널리 알려졌으나, 후자에 대하여는 1940년 발견될때까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기원설,범자기원설,몽골문자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있었으나 이책의 출현으로

모두 일소되고 발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였음이 밝혀졌다.

 

후자는 예의,해례,정인지 서문 등 3부분 33장으로 되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고, 해례는 정인지,박팽년,신숙주,

성삼문,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 집현전 학사가 집필하였다.

 

정인지가 대표로 쓴 서문에는 1446년 9월 상순으로 발간일을

명시하고 있어 후일 한글날 제정의 바탕이 되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동 이한걸가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에는 김태준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발견 당시 에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낙장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다고

하며, 이를 입수한 전형필은 6.25전쟁때 이 한권만을 오동상자에

넣고 피란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게 삼아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어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왜 훈민정문이 아니라 훈민정음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일도 있다.

 

문자를 창제해 놓고서는 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문자라고

하지 않고 바른 소리라고 햇을까 하는것 

 

이에 여러가지 의견들이 난립할 뿐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설은

없는 실정인데 이 의견들 가운데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감안하여

새로 문자를 만든게 아니다 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책략이 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국어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언론학 교수의 글임은 감안해야한다.

 

또 성음의 원리를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예를 들어 로마자에서는 동일 조음점과 조음방식이 d,t가 형태상 서로

완전히 관련 없는 반면 한글 ㄱ,ㅋ,ㄲ는 하나에서 다른 둘을 파생시켰고

그것은 소리의 유사성과 차이를 나타낸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시험삼아 사용해보기 위해 1445년에

용비어천가를 완성했다.

 

용비어천가는 1446년 훈민정음 반포 이후인 1447년에 간행됐다.

 

글을 지을 때 초중종 삼성이 모여야 합자를 이룬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ㅍㅜㄹㅓ 쓰지 말라고 하던 것과 다를 바없으며

이렇게 낱자를 만들어 놓곤 다시 모아 쓴느 글꼴을 보인다.

 

훈민정음은 표음문자지만 한자처럼 한 토막마다 하나의 완성자가

들어간다.

 

지금이야 수많은 다른 문자들이 알려져있고 표의문자인 한자와 달리

표음문자도 문자로 취급하지만 창제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의 

위상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는 있었으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극렬한 반대는 없었다.

 

문자로는 오로지 한자만이 인정받으며 표의문자만이 문자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그저 별 가치가 없는 문자가 아닌 그냥 표기일뿐이라는

입장으로 문자로 인정하지 않고 이두보다 못한 표기라고 치부당했다.

 

그러므로 한자서적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낭비,재원낭비라며 반대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어서 일본의 고유의 문자는

한자가 아닌 가짜 글자라는 의미의 가나이고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방법 중 하나인 주음부호 역시 문자가 아닌 부호다.

 

훈민정음도 문자 그자체가 아닌 소리를 표기하는 기호라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을 수 있다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훈민정음 해례본만 보더라도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선중기쯤 오면 백성들에겐 가뭄의 단비였고

사대부들에게도 한자를 보완하는 보조문자로써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외에도 훈민정음의 창제를 일반 민중이 글을 배워 문자의 혜택을

누리는 특권이 없어지는걸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철저히

후대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한 시각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양반 계층은 한글의 유용성을 알고 찬성하는 입장이였다.

 

실제로 이후 나오는 조선시대의 개인 문집을 보면 훈민정음 창제에

양반들의 호평이 이어진다.

 

 

물론 똑바른 인간만 있는게 아니라서 정창손의 상소에서 드러나듯

일반 민중을 태생부터 낮게 본 시각이 등장하기도 하나 집현전의

수많은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의 일화로 일반화를 시키는 것은 과잉사고이다.

 

애초에 정창손은 당대에도 꽤 삐뚤어진 사고관으로 종종 손가락질

받던 인물이다.

 

통념과는 달리 조선에서 법으로 인정한 계급은 왕족과 양인 그리고 노비뿐으로

말인즉슨 현실은 달랐지만 적어도 법으로는 사대부와 농부 모두 동등한

신분이었으니 양인을 하찮게 본 정창손이 얼마나 문제아 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일종의 이스터 에그가 있다는식의 설이 있다.

 

해례본의 아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ㄱ을 설명하는 글자로 임금 군자를

ㄲ을 설명하는 글자로 아기룡 자를 ㅋ 을 설명하는 글자로 즐거울자를

ㅇ을 설명하는 글자로 일자를 사용했는데 이를 합치면 군규쾌업, 곧 임금과

용이 즐겁게 일을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이상 훈민정음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가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