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문명에 대해서 알아보자!

2019. 11. 18. 16:26카테고리 없음

 

기원전 3200년에서 기원전 332년까지, 거의 3천년 가까이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이집트 문명은 항구성과 변화성의 교차에 문제점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조 시대에 살았던 이집트의 역사학자

마네토는 3천년의 기간을 30개 왕조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제1왕조는 이집트의 통일과 문자의 발명으로 시작되고, 마지막인 제 30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으로 끝이 났다.

 

이 3천 년의 긴 시기를 세분하는 문제는 정치,경제,사회적 변천 과정에 대한

명확한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다.

 

이집트 문명의 형성에 골격이 된 제 1,2왕조는 기원전 3200~ 기원전 2700년경에

존속하였는데, 그 수도가 나일 강의 중류에 있었던 티니스였기 때문에 티니스

시대라 하고 , 제 3왕조에서 제 6왕조까지를 상고 왕국시대, 또는 피라미드를 많이

세웠다 하여 피라미드 시대라 한다.

 

그 후, 제 8왕조에서 제 10왕조까지의 제 1차 혼란기를 거쳐 중고왕국 시대에 이르며,

이 시대는 제 11왕조와 제 12왕조의 통치 시기와 일치된다.

 

제 12왕조가 내분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침입한 힉소스족에 의하여 망한 후, 

이집트는 제 13왕조에서 제 17왕조까지의 제 2차 혼란기를 거쳐 근고 왕국 또는 이집트

제국 시대로 연결된다.

 

그 이후는 쇠퇴기인데 이것을 다시 세분하여 에티오피아 점령기, 사이트 부흥기 및

페르시아 점령기로 나눌 수 있다.

 

 

티니스 시대에 왕은 곧 신이라는 신왕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신왕은 결코 독선적으로 통치한다는 뜻이 아니고, 우주의 삼라만상처럼 마트에

순종하여 통치한다는 것이다.

 

왕은 또 이 마트의 표현매개체이며 구현체였다.

 

신왕과 마트의 개념은 그때까지 전래되어 온 신화와 통합된 것이다.

 

이 개념은 강고 왕국시대에 더욱발전하였으며, 제 4왕조때에 건립된 거대한 피라미드는

지금도 그 웅자를 자랑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인의 주신은 프타였다.

 

그는 본래 멤피스 시의 신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에 우주와 이집트의 창조신으로 받들어졌다.

 

이 신은 태양신을 비롯한 다른 모든 신도 창조하였다.

 

 

헤브루족이 신이 자연을 초월한 절대적 존재로 믿어지는 데 비하여, 우주의 창조신 프타는

자연적 요소의 구헌체로 우러러보인것으로 고대 이집트의 신화 속에 묘사되어있다.

 

즉, 그는 도시와 주를 창조한 지신의 역할도 수행한 것이다.

 

다른 모든 신은 프타 자신과 우주만물,나무,돌,흙 등으로 만들어진 존재로 보았다.

 

삼라만상과 모든 신을 창조한 후 주신 프타가 쉬고 있는 동안 태양신은 모든 생명을

키우는 원천으로 추앙되었다.

 

이 태양신 아툼이 매의 머리와 인간의 몸뚱이로 구현되었을 때 그의 분신,

즉 아들인 호루스로 받들어진다.

 

그가 죽었을 때에 오시리스로 모시게 되는 것이다.

 

 

즉, 호루스와 오시리스의 관계는 죽은 왕이 살아 있는 후계자에게 왕위를 세습시키는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왕의 즉위식에서는 죽은 부왕의 상을 매장하는 의식을 행하였는데, 이것을 통하여 권력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의 의미 이상이다.

 

즉 신의 섭리에 속하는 우주 질서의 한 부분으로 믿어지는것이다.

 

오시리스는 단순히 죽음의 신만이 아니고 부활의 신으로 추앙되었다.

 

성고 왕국 시대의 이집트는 문자 그대로 신정국이어서 신왕의 권력과 위신이 크게 드높았다.

 

이시대의 이집트 인들은 신 공동체 및 자연 등을 모두 신성한 우주의 구성 요소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은 있을 수 없었다.

 

왕은 곧 신이며 국가였기 때문에 왕 이외의 어떠한 다른 권위도 상상할 수 없었다.

 

즉, 신왕의 개인적 권위가 절대적이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처럼 특별한 법의 제정이

필요하지 않았고, 간단히 그의 명령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왕은 신이기에 그의 권력은 영원한 것으로 믿어졌으며, 그 상징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피라미드이다.

 

 

그 구조와 형태는 태양신의 숭배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왕위의 계승은 이미 예정된 질서를 재확인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탈은 단순한 정치적 변화로 보지 않고 우주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믿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상고왕국을 뒤따른 제1차 혼란기중에 신왕의 중앙 집권적 권위가

무너지고 귀족들이 각각 독립하여 서로 싸우는 혼란과 무정부 상태로 나타났다.

 

또 중고왕국을 뒤이은 제2차 혼란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나, 팔레스타인에서

힉소스족이 침입하여 한동안 다스린것이 색다른 점이다.

 

즉, 이들은 제2의 혼란기에 제 15,제 16왕조를 세웠다.

 

이러한 중앙 집권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혼란기를 수습한 왕조는 고대 이집트의

두 지역, 즉 적과 흑을 통합한 원초적 질서로 되돌아가서 고대 이집트의 문명을

부흥시킨다는 원칙에 집착하였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생겨난 비옥한 농경지에서 이집트인들은 역사의 여명기에

도시국가를 형성하였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합쳐져서 상,하의 왕국이 생겨났다.

 

그리고 기원전 3000년경 상왕국의 메네스왕에 의해 이집트의 통일이 성취되었다.

 

이집트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달리 폐쇄적 지형 위에 성립도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격변이 적은 편이다. 

 

먼저 멤피스를 수도로 삼은 고왕국 시대에는 파라오가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으며,

그것은 피라미드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수도를 테베로 옮긴 중왕국은 곧 아시아계통의 힉소스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곧 힉소스를 몰아내고 신왕국을 수립하였으며, 전차를 이용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확립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해상민족의 침략으로 기원전 12세기 이후에 쇠퇴하여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은 후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페르시아에게 침략을 받았다.

 

기하학,천문학,측량술이 발달했으며, 심진법과 태양력을 사용하였다.